정법 시론
선우를 가짐이 신행의 전부다
2026-07-28
♣ “수행자들이여, 이것 이외에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좋은 것들이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나쁜 것들이 버려짐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선우(善友)를 가짐’이다. 선우를 가진 이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좋은 것들이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나쁜 것들은 버려진다.” 《증지부경 1:8:1》
♣ 한때 아난다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청정을 닦는 이의 공덕은 선우와 자기 노력으로 인해 성취된다. 따라서 공덕의 절반은 선우에 기인하고 절반은 자기 노력에 기인한다.’라고. 그래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어, 선우를 갖는 것은 [최상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청정행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 선우를 갖는 것은 청정행의 ‘전부’다. 수행자가 선우를 가지면, 그는 성스러운 팔정도를 닦을 것이고 많이 닦으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 아난다여, 나를 선우로 삼아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인 중생들이 그것에서 벗어나고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들로부터 벗어난다.” 하셨다. …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께 나아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선우를 갖는 것은 [최상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청정행의 전부에 해당합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장하구나 사리뿟따여, 선우를 갖는 것은 청정행의 전부이다.” 하셨다. 《상응부경 45:2~3》
1.
위 말씀에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를 명심 실천해야 하겠다. 그 하나는, 의미상으로 분명히 스승인데도 부처님까지 포함하여 ‘선우’라고 하신 사실이다. 불교에서 선우(善友 Kalyāṇa-mitta)는 ‘생명의 길을 같이 걸으면서 바르게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좋은 벗’라는 뜻으로, 옆에서 돕는 도반과 앞에서 돕는 스승, 둘 다를 포함해서 쓰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머무실 당시의 인도는 전통적으로 엄격한 신분사회였고, 종교에서 스승은 제자를 ‘수직적 관계’로 두고 통제 지배하는 지위였다. 이런 강고한 사회적 관습을 배격하고, 벗이라는 ‘수평적 관계’의 단어를 쓰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부처님을 포함해 모든 존재는 무아·무경계의 동체 생명이며, 모든 생명은 부처님과 똑같이 본래 해탈된 대 자유인이다.’는 영원한 진실을 보셨기 때문일 것이다.
위 말씀에서 우리가 명심 실천해야 할 중요한 다른 하나는, 선우를 갖는 것이 청정행의 ‘전부’라고 하신 사실이다. 초기 주석서는 이에 대해 “자식에게 ‘어머니로부터는 이만큼 이익이 생기고 아버지로부터는 이만큼 이익이 생긴다.’고 분리해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해설하였다. 그러므로 최상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청정한 신행·수행에 있어서 선우를 갖는 것은 ‘필수 불가결의, 대체 불가한, 최우선적 조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우, 곧 스승의 안내·인도가 이렇게 지요하기에 부처님께서는 원적에 들기 직전 유훈을 남기셨다. “지금 수행자들은 서로를 모두 ‘도반(道伴 āvuso)’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고 난 후에는 이렇게 부르지 말아야 한다. 선학 수행자는 후학 수행자를 이름이나 도반이라는 말로 불러야 하고, 후학 수행자는 선학 수행자를 존자(尊者)나 장로(長老)라고 불러야 한다.”라고. 출가수행 공동체에서 부처님이 행하셨던 ‘선우, 곧 스승’의 역할과 권위를 조금이라도 이어가도록 하신 것이다.
2.
근년에 서울 한 법회의 불자들은 ‘스님들이 대개가 계율조차 잘 지키지 않으니 재가들과 별다를 바 없고, 그렇다면 출가와 재가는 평등하다. 재가들 가운데 뛰어난 이들의 능력은 대개의 스님들보다 우월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찰 운영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대다수를 차지하는 재가인이 주도하고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편 동남아 상좌부 불자들은 일반적으로 ‘스님들은 대개가 계율을 잘 지키며 청정하게 수행하는 이들이다. 보통 사람은 행하기 어려운 삶이기에 공경할 만하고, 공양하며 외호할 가치가 있다. 사찰 운영에 참여하지만, 중요한 일의 최종 결정이 부처님 가르침에 맞는지는, 전문적 지식·지혜를 가진 스님들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생각해보자, 출가하려는 이들이나 갓 출가한 이들, 즉 발심이 아직 견고하지 못해 환경에 휘둘리는 이들의 입장이 되어서. 앞의 두 가지 환경, 출가인에 대한 시선이 불신·경계인 환경과 신뢰·호의인 환경 중에서 어느 쪽이 이들의 성장, 불교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겠는가? 파계승들이 많다고 이를 일반화해서 출가승 전체를 싸잡아 폄훼하면, 승가의 위상을 깎아내리면, 부처님께서 신행의 ‘전부’라고 하신 ‘선우를 가짐’과는 되레 멀어지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부처님은 “아난다여, 미래세[의 승가 안]에는 계행이 청정치 못하고 삿된 법을 가졌으며 노란 가사 조각을 목에만 두른 일족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승가를 위해 그 계행이 청정치 못한 자들에게 보시를 베풀 것이다. 아난다여, 그렇더라도 ‘승가’를 위한 보시는 그 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나는 말한다.”라고 하셨다. 출가수행 공동체인 승가 안에, 소수일지라도 청정하게 수행하며 부처님 정법을 이어가는 선우(善友)들이 존재하기를 탄생하기를 바라며 승가에 보시하는 것은, 그 마음새가 고귀하기에, 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하신 것이 아닐까? 부처님 세존께서 바라신 호법은 이런 고귀한 모습이 아닐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이 복덕과 지혜인데, 지혜는 말할 것도 없고 복덕을 위해서도 ‘선우를 가짐’은 중요하다. 부처님께서는 “보시를 하더라도 수많은 범부에게 하는 것보다 한 명의 예류자에게 공양하면 더 큰 결실이 있다. 백 명의 예류자에게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일래자에게 공양하면 더 큰 결실이 있다. … 백 명의 아라한에게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여래·정등각에게 공양하면 더 큰 결실이 있다. 여래·정등각 개인에게 공양하는 것보다 사방의 승가에 공양하면 더 큰 결실이 있다. …”고 하셨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재가와 출가는 결코 경쟁관계가 아니다. 재가는 재보시로 출가는 법보시로 서로를 도와서, 복덕과 지혜를 다 갖춘 온전한 행복으로 함께 나아가는 아름다운 보완관계다.
2570(2026)년 7월
비구 불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