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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신행 제2강 - 내생의 행복을 희구하기

2026-01-29


내생의 행복을 희구하기



1. 현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 사유하기


◉ 죽음을 직시하지 않는 허물 : 우매한 자들은 죽음을 외면한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죽지 않을 거라 믿으며. 죽지 않는 쪽으로 생각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매일같이 살 생각에만 몰두하여 지낸다. ‘사는 동안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면서 이생의 안락을 위한 재물・권세・명성 등을 탐하여 크게 집착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을 크게 미워한다. 그렇게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번뇌들이 흐르는 냇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며 악업의 업력은 나날이 무거워져간다. 결국 정법의 감로와는 점점 멀어져서 선취와 해탈의 명줄이 끊어지고 죽어서 고통스런 악도로 가게 되니, 이보다 나쁜 상황이 또 어디 있겠는가.


◉ 죽음을 직시하여 얻는 이익 : 죽음을 아무리 직시하며 두려워한들 이미 태어난 몸은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 생을 위하여, 악도에 태어날 원인을 막지 못하고 선취와 해탈의 원인을 이루지 못한 채 죽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런 두려움을 가진다면 자연히 선취와 해탈의 원인을 이루게 되므로 죽음에 직면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세인과의 진리를 믿고서 죽음을 직시하는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면, 마치 키질을 하여 쭉정이를 골라내듯 단지 이생의 안락을 위해 사는 잘못된 노력과 악업을 버리게 되고, 귀의와 지계를 비롯한 선업에 지속적이고 열렬하게 노력하게 된다. 


◉ 죽음을 직시하는 사유 방법 :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생각하며 마음에 사무치도록 새긴다. ① 나는 반드시 죽는다! 이미 태어난 몸의 죽음은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수명은 늘지 않고 끊임없이 줄어가므로 반드시 죽게 된다. ② 오늘이 이번 생의 마지막 날일 수 있다! 죽음의 인연은 많고 삶의 인연은 적은, 연약한 것이 인간의 육체여서 언제든 죽을 수 있다. ③ 죽을 때는 정법 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의 가르침에 따른 선취와 해탈의 원인을 오늘 지금 이루어야 한다. - 삼세인과와 육도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은 불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교인이라면 반드시 늘 죽음을 직시하며 내생을 생각해야 한다. 



2. 악도 고통, 선취 행복을 사유하기


◉ 지옥 축생 아귀의 고통 

◾ 지옥의 고통 : “여덟 큰 지옥 중 한 곳은 드넓은 지역의 사방이 철벽으로 에워싸여 있고 바닥과 지붕도 철로 되어있[어 빠져나갈 수 없]다. 동서남북의 벽마다 한 개씩의 문이 있고, 문 밖에는 네 개의 작은 지옥들이 있다. 그 동쪽에서 화염이 솟아올라 서쪽으로 돌진하고, 서쪽에서 화염이 솟아올라 동쪽으로 돌진하고, 북쪽에서 화염이 솟아올라 남쪽으로 돌진하고, 남쪽에서 화염이 솟아올라 북쪽으로 돌진하고, 바닥에서 화염이 솟아올라 지붕으로 돌진하고, 지붕에서 화염이 솟아올라 바닥으로 돌진한다. 거기서 그는 불에 타는 격심한 고통을 겪지만 지은 악업이 끝날 때까지 죽지도 않는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벽 문 하나가 열릴 때가 있다. 그러면 그는 재빨리 그곳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문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의 몸은 뼈까지 다 타서 연기로 변해버리는 격심한 고통을 겪는다. 또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벽 문 하나가 열릴 때가 있다. 그러면 그는 재빨리 그곳으로 도망친다. 그는 몸이 뼈까지 다 타서 연기로 변해버리는 격심한 고통을 겪으며 그 문으로 빠져 나온다. 그러나 그곳은 또 다른 작은 지옥들이어서 그는 계속해서 격심한 고통을 겪다가 다시 큰 지옥으로 돌아간다. 그는 지은 악업이 끝날 때까지 죽지도 않는다. …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을 다른 누구에게 듣고서 그대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직접 알고 직접 보고 직접 발견한 것을 그대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 『구사석론』에 “여덟 곳 화탕지옥과 여덟 곳 한빙지옥은 모든 중생의 공업(共業)으로 실제 형성된 것이다. 고독지옥들은 다수 혹은 한둘의 별업(別業)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다양한 형태가 다양한 장소에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그 원인을 밝혀놓았다. 

◾ 축생의 고통 : 힘이 약한 것들은 힘 센 것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힘을 당하고,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이 두려움으로 긴장하며 떨어야만 하는 것이 축생이다. 또한 비인이나 인간의 제물이 되거나 도구가 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매 맞고 부림을 당하는 것이 축생이다. 

◾ 아귀의 고통 : 굶주림과 목마름에 늘 시달리는 아귀들은 지은 업에 따라 다른 세 종류가 있다. 먹을거리 마실거리에 ‘외적’인 장애가 있는 아귀들은 언제나 다른 중생들의 방해로 먹고 마시는데 고통을 겪는다. ‘내적’인 장애가 있는 아귀들은 입이 바늘구멍처럼 좁거나 입에서 불이 나와 음식물을 태워버려서 먹고 마시는데 고통을 겪는다. 음식물 ‘자체’에 장애가 있는 아귀들은 오물이나 악취 나거나 해로운 것만 먹고 마실 수 있고 깨끗하거나 좋은 음식물은 취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 악도의 고통을 사유하기

◾ 생각해 보자. ‘지금 당장 화로의 잿불에 손을 넣어 하루를 견딜 수 있는가? 겨울의 칼바람 속에 알몸으로 얼음 위에 엎어져 하루를 견딜 수 있는가? 먹고 마실 것이 전혀 없는 고통을 며칠이나 견딜 수 있는가? 이 정도의 고통조차 견디기 어렵다면 화탕지옥과 한빙지옥의 고통, 그리고 축생이 산 채로 잡아먹히는 고통과 아귀의 고통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이와 같이 이생에 겪을 수 있는 고통의 경험에 견주어서 악도의 고통을 가늠하여,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날 때까지 삼악도의 고통을 거듭거듭 사유해야 한다. 그리고 악도의 고통을 충분히 알고 난 뒤에는 그 생각에 습성이 생겨야 한다. 일시적인 사유만으로는 내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악도의 고통을 사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고통의 세계에 떨어지는 이치를 사유하면, 그 고통이 불선(不善)의 과보임을 알게 되어 악행에 대한 큰 거부감이 생긴다. 또한 행복이 선(善)의 과보임을 알게 되어 선행을 좋아하게 된다. 나아가 윤회에 염증을 느껴서 해탈을 구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남의 고통을 헤아리면 같은 고통을 겪는 타인에 대해서도 연민심이 일어나게 된다.

  게으름을 끊고 정진을 크게 일으키며 마음을 이끌어 해탈을 얻게 하는 근본 원인으로서 ‘윤회의 고통’을 사유하는 것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 불세존께서 살아계시더라도 이러한 고통을 깊이 사유하는 고통관(苦痛觀)보다 나은 방법을 말씀하실 리가 없다. 이로써 하근기와 중근기의 마음이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이치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 선취의 행복을 사유하기 

◾ 삼악도의 고통을 충분히 사유한다면, 그런 큰 고통이 없는 삶 자체가 큰 행복이라는 사실로서 선취의 행복을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다.

◾ “현명한 이는 오계를 지키므로 과보의 두려움 없이 지금 여기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린다. 몸과 말과 뜻으로 선행을 하여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또는 천상에 태어난다. 천상의 즐거움은 비유를 드는 것도 쉽지 않다. … [천하를 정복해 통일한] 전륜성왕이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을 천상의 즐거움에 견주면, 주먹만 한 크기의 돌 하나를 히말라야 산과 비교하는 것 같이, 그것은 작은 조각에도 미치지 못하며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 그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인간으로 태어나면, 고귀하고 부유하고 수려하게 태어난다. 그런 이는 [살아가는 동안 악인에게 영향 받지만 않는다면] 몸과 말과 뜻으로 선행을 하고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 [또다시] 좋은 곳 또는 천상계에 태어난다.”



3. 희구하는 마음이 실제 일어난 상태


◉ 사람이 된 기회를 가치있게 쓰는 첫 단계의 목표는 죽음을 직시하여 ‘내생의 행복을 희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심오한 진리를 닦지 못하는 자들의 수행이라고 치부하거나 수행할 바이긴 해도 처음 잠시 할 것이지 계속 할 바는 아니라는 생각을 버리고, 육신에 자재한 수행지위를 이룰 때까지 닦아야 하는 중요한 수행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 이전에는 이생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절실한 마음이 있었지만, 현생이 곧 끝날 수 있고 내생이 가까이 있으므로 내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아직 멀었다. 거기서 진일보하여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내생의 행복을 희구하는 마음이 주가 되고 현생이 부수적인 것이 된다면, 즉 내생의 큰 행복을 위해서 현생의 불편과 고통을 감수한다면, 그때 비로소 하근기의 의요(意樂)가 즉 목표를 결정하고 추구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하근기의 의요가 생겼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후에도 닦음에 힘써야 한다.



2569(2025)년  비구 불퇴